3.5 / 5.0



양들의 침묵을 감명깊게 보고, 그 다음으로 괜찮다는 한니발을 봤다. 이 한니발 시리즈는 총 4편인데 이 중 레드드레곤과 한니발 라이징은 졸작이라는 평이 많아서 여기까지만 보고 멈추기로 한다.


1

양들의 침묵은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말 깔끔하고 괜찮았다는 인상인데, 한니발은 좀 어수선했다는 느낌이다. 그러니 둘 중에 고르라면 나는 양들의 침묵을 고를 거다. 양들의 침묵 이후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. 분명 영상미...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연출이나 내용 면에서 분명 좋은 부분이 있었고, 내 취향이 있기도 했지만! 되려 그 요소들 때문에 등장인물들 심리는 죄다 놓친 기분이었다.

특히 클라리스... 너무 전형적으로 정의롭고, 남초직장에서도 꿋꿋한 당찬 인물인데 한니발에겐 동요한다. 차라리 개성 있는 캐릭터로는 메이슨 버저가 더 개성있었다. 외모를 떠나서 한니발 렉터를 쫓는 점이나 그에게 복수하기 위한 방법같은 게 꽤 인상적이었다.


* 스포주의 *


2

어... 방금 막 다 본 거라서 자꾸 엔딩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데... "손목 위를 자를까, 손목 아래를 자를까? 많이 아플 텐데."ㅋㅋㅋㅋㅋㅋ 이거 나만 쫄깃하게 본 건가? 난 당연히... 너무 당연히...... 클라리스 손목을 내리칠 줄 알았는데... 내가 한니발 렉터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가보다^^. 사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게 아니어서 엔딩이 그렇게 끝나니까 머릿속이 싸해지는 것 같기도 하면서, 그런 행동이 더 한니발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주나 싶기도 하면서... 아 왜 공포스릴러를 빙자한 로맨스라는지 알 것 같고. 난 클라리스 손목이 상하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지금 다시 곱씹어보면 한니발은 언제나 클라리스를 존중해왔고, 고고한 자존심? 자기만의 고상한 방식들을 고수해왔는데 그걸 경찰에 잡힐 것 같다고 단번에 내팽개칠 인물이 절대 아니다.


나는 이제껏 클라리스에 대한 한니발의 감상은 '상황이 어떻든 한결같이 정의로운 여자에 대한 경의나 애정에 해당하는 사랑'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나아가 에로스적 사랑이라니 시벌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키스할 때 진짜 찬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. 아니 대애체 언제. 마치 조커가 배트맨에게 끈적하게 키스한 걸 지켜본 기분이다.

그 상황에서 수갑을 채운 행동 자체가 클라리스가 한니발을 도발하는 거라고 생각했다. 이를테면 네가 날 정말로 사랑한다면 혹은 존중한다면 얌전히 잡혀라. 그게 아니라면 지금까지의 너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도망가라. 뭐 그런 느낌. 애초에 그런 식으로 시험하는 것 그 자체로도 한니발을 도발하는 것이고. 거기서 나는 한니발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클라리스에 대한 애정보다 클 거라고 생각했고, 당연히 클라리스 손목이 동강나는 걸 기대했지 뭐... 이후에 나온 강 건너편의 폭죽도 '축하해, 클라리-스. 네가 이겼어.' 뭐 이런 의미인 줄 알았지. 근데 결말은ㅋㅋㅋ 그럼에도 작중에서 한니발이 확실히 클라리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인간이기는 한 게, 클라리스가 준 선택지는 1) 얌전히 잡힌다 2) 클라리스 손목을 턴다 였는데 한니발은 제3의 선택지 내 손목을 턴다 를 골랐다;;;;; 이게 진짜 딱 그렇게 되자마자 의외라고 생각했던 게, 한니발이 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하면 자비없이 갚아주는 것만 봐와서 자기희생정신이 있을 줄을 몰랐다ㅋㅋ 아님 그냥 내가 창의력이 부족한가?


3

양들의 침묵, 한니발에서 멈추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. 두 사람의 뒷이야기가 궁금했는데, 양들의 침묵에서 강조되었던? 인상 깊었던 면에 대해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아서?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른 편에서는 얼마나 더 이야기가 딴길로 샐지 좀 궁금하다... 아니 사실 전혀 안 궁금함.


4

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은 클라리스에게 양들의 비명이 멈추었냐고 묻는다. 그래서 난 당연히 한니발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클라리스와 그걸 가지고 또 딜을 거는 한니발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. 그런데 그러나 오픈해보니 영화 내용은 그게 아니고요... 상사가 클라리스 괴롭히니까 쫓아와서 앙갚음하고요... 시종일관 한니발이 클라리스를 챙기는...? 느낌이었지만 전작 양들의 침묵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생각은 했다. 양들의 침묵이 견습생 클라리스가 정말 렉터 박사에게 한 수 배우는 상하 구조로 이루어져있다면, 한니발에서는 요원 클라리스가 그저 인간 대하듯 렉터 박사를 인간 1로 대하는 수평 구조로 진행된다고 느꼈다. 전작보다 훨씬 더 고분고분하게 굴기는 합니다만^^. 어쨌든 머리가 좀더 크고 연륜이 쌓인 클라리스 덕에 전작보다 치열한 눈치/두뇌싸움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. 클라리스는 꾸준히 사람을 구하지 못했는데 여전히 양들은 꽥꽥 비명을 지르고 있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. 그에 대한 부분이 크게 드러나지 않아서 좀 아쉽다.


5

이쯤 되면 진짜로 원작 소설을 봐야겠다 ^.^ 영화에서는 다루지 못한 설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점점 더 궁금해져서. 영화 리뷰들을 보니 원작 소설에서 아쉬운 부분들을 영화에서 잘 메꿨다는 평들도 여럿 있던데... 괜한 짓을 하는 걸까?


6

영화 자체는 재미있게 봤다. OST도 좋았고, 상징적인 요소들도 좋았고, 연출도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. 다만 이유를 모르겠는데 정신이 좀 없어서. 어쨌든 재미나게 본 영화고, 기회가 되면 꼼꼼하게 재탕해보고 싶다.